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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一 51/エンタテイナーの条件

[도모토 코이치] 엔터테이너의 조건 #05 「행복하기 때문에 몰아넣는다」 고 하는 비만족 스타일

by 자오딩 2016. 3. 12.

エンタテイナーの条件 * 엔터테이너의 조건

 

# 05

 

 

「幸せだから追い込む」 という非・満足スタイル

행복하기 때문에 몰아넣는다」 고 하는 비만족 스타일

 

 

 

  연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렵네요. 왜냐하면 "지켜주는 것" 이 적은 느낌이 들기 때문. 노래하면 멜로디, 댄스에는 안무라고 하는 "가이드 라인"이 있습니다만, 연기란 거기에 준하는 것이 없는. 대사를 말하는 방법 하나에 있어서도 무한대의 표현 방법이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제가 드라마에 첫 도전한 것은 단발 드라마 "사랑이여, 잠들지 말아줘"(닛테레계, 93년) 입니다. 그 다음 해에 쯔요시와 "인간 실격" (TBS계) 에 나왔습니다. 이 드라마는 오디션이었습니다만, 오른쪽도 왼쪽도 알지 못하는 상태 그대로 받으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또 특이한 역이었습니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면서 '머릿속에 파리가 있어!' 라고 소리친다" 라고 대본에 써있는거에요. 15세였던 저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은 역이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반대로 그게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역할의 광기를 어떻게 하면 카메라에 비출지 자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연기의 abc도 모른채 몸으로 부딪혔던 것으로, 역할의 괴이함 같은 것이 나왔던 것이 아닐까 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녀석 완전 이해 못하겠어" 라고 하는 역 쪽을 마음껏 연기할 수 있습니다. 고민할 것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수백가지로 파악할 수 있는 "상상의 여백" 도 남길 수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반대로 오히려 공감하는 인물을 연기하면, 정합성이나 공감성을 이것저것 생각해서 "나는 이런 것을 전하고 싶은데!" 라고 하는 집착이 나오는. 결과, 상상의 여백이 묻혀버리기 쉽게 되네요.

 

  저는 영상에서의 연기와 무대의 연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라면 화면이라고 하는 "상자" 속에서 연기하고 있는 감각. 카메라의 프레임에서 삐져나오는 것 없이, 효과적인 앵글을 의식하면서 연기하는 데는 독특한 테크닉과 지구력이 요구 됩니다.

 

 

 

■ 무대 연기가 과장되는 이유

 

 

  무대도 지구전입니다만 "라이브" 이기 때문에 방출하는 에너지, 즉, 거기에서 생겨나는 파워쪽이 중요하게 되어옵니다. 무대적인 연기를 "과장이라 어색하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대 위에서 드라마와 같은 연기를 했다간 그건 절대 잘못된 거에요.

 

  예를 들면 발성이 되지 않은 사람이 무대에 섰다고 해도, 마이크로 소리를 주워서 PA(확성 장치)로 처리하면 크게 들리게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큰 극장에서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만, 그래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와 직접 살아 있는 몸에서 방출된 소리가 동시에 있다고 할 때는 관객에게 전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테크닉면으로 말하자면 해외 배우는 대학의 연극부 등에서 공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일본에서는 그다지 중요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이 무섭네 라고 생각해 연기 워크샵을 받으러 갔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감각이 조금씩 바뀌어왔습니다. 분노의 표현을 하기 위해서 잔뜩 세워놓은 기둥 같은 것을 힘껏 치며 소리친다고 하는 훈련이 여러가지 있었습니다만, 역시 기초는 먼 훗날 역할에 드러나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몸에 붙었습니다.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는 답하고 싶지 않네요. "그 사람을 의식하고 있구나" 라고 억측 하는게 싫으니까ㅎㅎ 굉장하다고 생각한 분 중에서 기억에 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 역할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하는 것을 매일같이 했던 어느 여배우 분. 커튼콜에서 나올 때까지는 역할의 분위기였는데 객석에 한 번 인사한 순간 후왓 하고 뭔가가 풀린 것 같이 본 모습이 되었어요. 딱히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닌데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와!" 라고 생각했네요.

 

  저의 "풀리는" 순간은 언제인가 하고 생각하면 역시 커튼콜에서 인사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반대로 막이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무섭고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는. 오늘의 자신의 상태로 체력적,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을지, 제대로 표현할수 있을지...라고.

 

  Endless SHOCK 에 밀착한 다큐멘터리에서 비친 모습이 릴랙스한 것 처럼 보이는 것은 그렇게 가장 하고 있을 뿐으로 어느 의미, 거기서부터 이미 연기가 시작되어 있는. 무섭지만 거기에 삼켜져 버리면 아웃이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평상심으로 있으려고 자신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아게모시나이. 그것이 저의 방식.

 

  하지만 막이 올라가버리면, 자신 속의 스위치가 들어갑니다. SHOCK 에는 계단 구르기 라고 하는 볼거리 장면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신기한 것이, 본방 중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해요. 리허설에서는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그러니까 최근은 리허설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본방 전에 떨어지는 것은 게네프로 (전체 케이고)의 한 번뿐입니다 ㅎㅎ

 

 

 

■ 실연령이 역을 뛰어넘었을 때

 

 

  연령에 의해서 연기가 변해온다고 하는 것도 실감하는 것으로써 상당히 있습니다. SHOCK 에서 연기하고 있는 코우이치라고 하는 인물은 현행의 각본이 만들어진 2005년 시점에서는 어디 하나 나무랄데가 없는 "슈퍼맨" 이었습니다.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갖고 있어야할 정신을 그대로 쏟아부은 이른바 저의 이상성. 하지만 자신의 실연령이 역할의 연령을 넘은 것으로, 미숙함이나 약함이 보여져 왔기에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코우이치는 처음 시절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인간 냄새가 나게 되었네요. 어쩌면─ 어쩌면입니다만, 약한 부분을 표현 하고자 하는 만큼, 제 자신 쪽이 코우이치보다도 조금 강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매일 느끼는 것입니다만, 스토리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평온하지 않을 때, 풍요롭지 않을 때 쪽이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는 일상의 울분이나 슬픔이 오락으로 승화되어 시간이 지나면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나. 저는 "미스 사이공" 같은 구원이 없는 스토리를 좋아합니다만 비극의 종류를 좋아하는 것은 지금의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인거네요. 일상이 평화롭기 때문에 엔터테인먼트에서 슬픔, 괴로움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까. 지금 세상도 정말로 곤란해하거나 고민하거나 하는 사람은 (반대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은, 행복한 스토리를 보고 싶을테니까.

 

  축복받지 않은 세상 쪽이 스토리가 태어나는. 그런데 축복받은 세상이 아니라면 그 스토리를 보는 사람도 연기하는 사람도 없어져 버리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이런 표현의 일을 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몰아넣는 작업" 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몰아넣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않는 것. 항상 "좀 더 좀 더" 라고 생각하고 만족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몰아 부쳐져갈테니까. SHOCK 중에 "괴로워 하면 한 가지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연기에 정답이 없듯, 제 자문자답은 계속 이어지겠지요.

 

 

(2014년 1월호)